[성명학] 이름 불용한자 불용문자의 고찰 3편 불용한자의 역사

성명학/불용한자|2019. 3. 7. 12:44

1편 보러가기


2편 보러가기


불용문자는 역사적으로도 존재했을까?


고문헌인『예기(禮記)』와『춘추좌전(春秋左傳)』에 사람 이름자에 나라와 산천 등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불용문자에 관한 기록이 가장 먼저 나타난다.


“자식 이름을 지을 때는 나라의 이름으로 짓지 아니하고, 일월의 이름으로 짓지 아니하며, 신체에 감추어진 흠으로 짓지 아니하고, 산천의 이름으로 짓지 않는다.”


-『예기』「곡례(曲禮) 상(上)」


“9월 정묘에 아들 동(同)이 태어났다. 환공이 신수에게 이름에 대해서 물으니 대답하기를 (…) 국명으로 이름 짓지 아니하고, 관명으로 이름 짓지 아니하며, 산천의 이름으로 이름 짓지 아니하고, 몸에 감추어진 흠으로 이름 짓지 아니하며, 축성(畜性)으로 이름 짓지 아니하고, 기물과 폐백으로 이름 짓지 않는다.”


-『춘추좌전』「환공(桓公)」6년조

 

불용문자의 근거로 볼 수 있는 ‘주(周)나라 사람의 피휘(避諱)’가『춘추좌전』에 등장하고, 통일신라 성덕왕(聖德王)(702-737)의 피휘도『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주나라 사람들은 휘(諱)로써 신(神)을 섬기니 사람이 죽게 되면 장차 그 이름을 휘합니다.”

-『춘추좌전』「환공(桓公)」6년조


“성덕왕이 즉위하였다. 휘는 흥광이고, 본명은 융기인데 당 현종의 이름과 같아서 선천 연중에 흥광으로 고쳤다.”

-『삼국사기』「신라본기(新羅本紀)」「성덕왕(聖德王)」원년조




 그러므로 모든 유형의 불용문자를 포함하는 광의(廣義)의 불용문자는 중국은 춘추시대, 한국은 통일신라부터 이미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에서 전승해온 갖가지 점복과 예언·도참들을 빠짐없이 조사하여 집대성했다는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의『조선의 점복과 예언(朝鮮の占卜と豫言)』(1933)을 통해 볼 때 적어도 193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는 이름이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1940년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시행되면서부터 일본의 수리 성명학자들이 개명·작명이 개운(開運)의 수단이라고 대대적으로 광고하면서 이름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점차 믿게 되었다.




 이처럼 193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이름과 당사자의 운명을 결부짓는 경향은 일반화되지 않았으므로, 당사자의 운명에 나쁜 영향이 있다고 여겨지는 협의 불용문자인 불길문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문헌이나 조사 분석한 어떤 문헌에서도 일제 이전까지 이름과 당사자의 운명을 결부짓는 문헌은 없었고, 이름자의 불용문자나 불길문자에 대해서 언급된 적도 없었다.


 조사한 문헌 중 김기승은 일제 강점기와 6·25사변을 겪으며 측자파자(測字破字)로 점(占)을 치면서 불용문자가 파생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종합해볼 때 협의(狹義)의 불용문자인 불길문자는 이름과 당사자 운명이 결부되기 시작한 일제의 창씨개명을 거치면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모자음 오행성명학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