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학] 음과 양! 음양에 대한 모든 것 정리

역학/사주|2019. 4. 10. 06:00

오늘은 음양오행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음양오행의 이치를 궁구함에 있어서 가장먼저 음양의 이치를 파악해 보는 것이 순서이다. 


그래서 이번 장에서는 음양에 대한 이해를 해보는데, 실은 음양이라고 해서 오행과 분리해서 별도로 존재를 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는 매우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져서 들숨과 날숨처럼 연결되어져 있으니, 이것을 별도로 논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밖에 없다.


그런 줄은 알면서도 이렇게 음양론이라는 항목을 만들어 본 이유는 초학자들로 하여금 개별적으로 그 형상을 이해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이해를 해 놓고 나서는 나중에 다시 한 덩어리로 모은다는 것을 이해하고서 공부에 임해주시기 바란다. 음양이라는 분류를 하기에 앞서서 음양이 생기기 이전에는 어떻한 상황이었는지 잠시 생각을 해보도록 한다.




1. 陰陽의 以前


음과 양의 맨 처음 시작은 어디서 부터인지 지식으로는 알기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예전의 시간감각에도 문제가 있었겠지만, 기실은 옛 사람들은 시간에 대해서 그렇게 전전긍긍하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원래 음양의 이전에는 두 종류의 기운이 서로 분리가 되지 않고서 엉켜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뭔가 시간이 흘러가면서 분리가 되고 정리가 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느끼는 자연법칙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음양으로 나누기 이전에도 무엇인가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 형태는 음양으로 분류가 되기 이전의 기운일 것이라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이러한 성분을 혼돈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무난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는데 사실 혼돈이라는 말은 장자에서도 보이는 말이기 때문에 매우 오래전의 우주의 형상이 이렇게 음과 양으로 분리되기 전의 형태로 이해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장자(莊子)의 내편(內篇)에 응제왕의 마지막 대목에 아주 간단한 내용이 있다. 풀어서 적어보면 이런 내용이다.


[남해의 왕과 북해의 왕이 중앙의 왕인 혼돈의 나라에 놀러와서는 아주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 답례로 무엇을 선물할까... 하는 의논을 하다가 혼돈을 보니까 보통 사람들은 일곱 개의 구멍이 있는데 혼돈은 구멍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두 임금은 의논을 한 끝에 하루에 한 구멍씩 7일동안 일곱구멍을 내줬는데, 마지막 구멍을 내자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이러한 장자의 유명한 우화가 있는데 아직도 모르시는 분이 있다면 이런 기회에 한수 익혀 두는 것도 좋겠다. 이 이야기를 볼적에 자연적인 원래 생긴대로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고 편안한 것인데, 뭔가 인위적으로 조작을 하는 것은 본래의 모습을 망가트리는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된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음양이 나눠지기 이전의 모습을 궁리하다가 문득 그 모습은 혼돈의 형태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언급을 하였는데, 실로 음양을 나누기 이전의 형태라고 볼적에 혼돈이 가장 어울리는 모습일 것이다.


혼돈이란 뒤죽박죽이라는 뜻도 있지만, 명확하게 나눌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 아닌가 한다. 어찌보면 어두컴컴한 상태라고 생각이 되기도 한다. 밤도 낮도 아닌 시간, 이를 일러서 혼돈의 시간이라고 하면 적절한 표현이 될것으로 생각된다.


요즘에는 혈액(血液)을 갖고 실험을 하는 장면이 텔레비젼을 통해서 종종 보이는데, 이 중에서 혈액을 분리하는 장면이 보인다. 


그 혈액은 처음에는 그냥 붉은 피인데 실험을 위해서 원심분리기에 들어갔다 나오면 그때는 위와 아래로 나뉜다. 이러한 상태의 이전 즉 원형의 혈액을 그냥 혼돈의 상태와 비교해보면 어떨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렇게 분리가 되어버린 액체는 이미 인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않는 물체일 것이다. 혼돈이 죽어벼렸다는 말에서 낭월이는 원심분리기 속에 들어있는 혈액을 떠올려보게 된다. 뭔가 연관성이 있어보이기 때문이다.


지구의 원형에서 하늘과 땅으로 나뉘기 전에 오행의 기운이 분류되지 않고 뒤섞여서 함께 빙글빙글 돌고 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도 된다. 


이를 일러서 음양의 이전이라고 이름한다. 그야말로 전체의 모습도 될것 같고, 이성이니 감성이니 하는 분류를 하기 이전의 천진한 상태가 바로 음양분리 이전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해본다.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무극(無極)의 상태도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2. 陰陽의 分類


원래의 분리할래야 분리할 수가 없는 한 덩어리의 혼돈이었는데, 어떠한 작용이 개입하면서 음양으로 분류가 되었다고 설명을 한다. 


이쯤 오면 이미 상대적인 개념이 형성된다. 크고 작음이나 높고 낮음이나 맑고 탁함 등의 구분을 하게 되는 것이 음양이라고 생각된다. 


아름답고 추한 것이 형성되는 단계라고 볼 수 있겠다. 음양이란 이렇게 선과 악이 나뉘는 것을 말한다. 선악은 이미 전체를 잃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최초에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리라고 본다. 어쩌면 지금 궁리를 한다고 해도 정확히 알 수가 없을것도 같고, 또 그럴 필요도 없으리라고 생각해본다.


우리는 지금에 살고 있으며 지금의 이 대기에 가득한 공기를 마시고 살고 있는 이상, 지금의 현재의 우주에 대해서 궁리를 해보는 것이 더욱 이익이 많으리라고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음양으로 분리되어서 커다란 흐름을 만들면서 서로 대립과 보완의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한쪽으로 치우지면 지구는 그 즉시로 폭발을 해버릴 것도 같은데, 묘하게도 조화를 이루면서 서로를 견제하면서 질서있게 흘러가는듯 하다. 


그런데 보통의 사람눈에는 음양은 서로 대립을 하고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마음에 대립되는 마음이 있어서일까···


그러나 이것이 또한 인간의 모양임에 어쩌랴··· 그래서 어쩔수 없이 음양이라는 분리의 대립을 이해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러한 것이 극단적으로 흐르면 선악의 대립을 불러온다.


음양은 서로 대립을 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한다면 결국 그정도 밖에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음양의 마음은 서로 균형을 이루고자 함이다. 균형은 아름답다. 즉 기울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마치 시이소오의 중심점을 생각하는 것이다. 


올라가는 것은 양이고 내려가는 것은 음이라고 한다면 음과 양은 서로 오르락 내리락 할적에 재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 둘 중에서 어느 하나의 기운이 지나치게 많거나 적다면 균형은 무너지게 된다. 그러면 정말 재미없는 게임이 되는 것이다. 


한쪽으로만 기울어져 있는 시이소오를 연상해보라 무슨 재미로 매달려서 놀겠는가? 그렇지만 중심점이 있으므로 두 어린이는 몇시간이고 그렇게 깔깔거리면서 오르락내리락 음양의 균형을 즐긴다.


이러한 상태를 빌어서 음양이 균형을 이룬 상태라고 말하거니와 우리가 배울 명리학(命理學)도 실은 기울어져있는 음양의 편차를 어느 곳에다가 중심점을 잡으면 바르게 균형을 이룰것인가에 촛점을 맞춰보는 게임이라고 말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일단 陰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 쉽다. 그러면서도 서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미뤄서 짐작을 하면 될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니까 항상 대립의 사이에는 중간이라고 하는 보이지 않은 영역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바란다.


陽陰陽陰

物質的

또는

精神的단단하다 부드럽다밝다어둡다

유정물(생물)무정물(광물)활발하다침체적이다

여름철겨울철봄철가을철

나무암석불물

남자여자소년(少年)노인(老人)

희망(希望)절망(絶望)미래(未來)과거(過去)

시간(時間)공간(空間)기쁨슬픔

지혜(智慧)우치(愚痴)정령(精靈)사귀(邪鬼)

부자(富者)빈자(貧者)시작(始作)종말(終末)

얼굴뒤통수등부분배부분


표에서 보면 모두는 서로 상반된 형태를 하고 있다. 이렇게 음양의 구조는 서로 대립이 되는 것으로 우선은 이해를 하는 것이 가장 편리할 것으로 생각이 된다. 


원래 유치원에서 처음으로 교육을 할 적에도 우선은 큰 것과 작은 것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순서이니까 말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서 의식이 향상되어가면 점차로 확장을 해 나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방법이 되겠다. 그래서 여기에도 그러한 방법을 활용하여 서로 대립되는 구조를 보여드린다.




(1) 남자는 양(陽) 여자는 음(陰)


우선 설명을 위해서 남자와 여자를 대표로 내세웠다. 누구던지 남자와 여자를 음양의 대표적인 구조로 이해를 하는데 가장 빠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물적으로 말하면 성기의 구별이라고 하겠는데, 암컷과 수컷이 그것이다. 그럼 이번에는 남녀라는 형태를 빌어서 좀더 구체적으로 분류를 해보도록 한다. 


그래서 과연 남자는 양이라고 할만 하고, 여자는 음이라고 할만한가를 살펴보는 것이 올바른 이해가 될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누구나 알지만 실제로 음양오행가의 안목으로 낱낱히 분석을 해봐야 학자다운 이해력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되어서이다. 심리적인 면이나 형체적인 면에서 함께 생각을 해보도록 하자.


남자/여자


성격활발하고 개방적이다/ 세심하고 폐쇄적이다

골격강건하고 굵으며 힘세다 / 부드럽고 가늘며 연약하다


성기돌출되었고 정액이 발산된다/ 함몰되었고 수동적이다

성욕충동적이고 적극적이다 /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다


음성굵고 힘차다 / 가늘고 부드럽다

활동외향적이며 밖에서 활동한다 / 내성적이며 집에서 활동한다


취미스릴과 위험한 일 / 안전하고 아기자기한 일

재물즉흥적이며 소비성이다 / 계산적이며 절약성이다


명예남들이 높이보는 것에 흥미/ 남편이 원하는 것에 흥미

기타전반적으로 외향적이고 발산 /전반적으로 내성적이고 수렴


이렇게 간단하게 남녀를 대표할만한 구조에 대해서 나열을 해 본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반론이 나올 수도 있겠다. 여자도 얼마든지 명예를 탐하고, 밖으로 활동을 하는 사람도 있고, 또 남자도 집안에서 가정을 돌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이다.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가장 일반적인 상식에 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상식을 무시하고서 개별적으로 논한다면 어디 무엇으로 기준을 삼아서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구체적인 상황보다는 대략적인 구조로써 음양의 대립되는 형상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사실 이제 시작이다. 수없이 다양한 명리학의 의치에 대해서 연구를 하다가 보면 얼마든지 다양한 남녀의 구조에 대해서 궁리를 해볼 자료가 대기하고 있다. 


지금부터 완벽하려고 서둘지 않더라도 얼마던지 정밀하게 연구하고 추리할 기회가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냥 일반적인 이야기로만 이해를 해주기 바란다.




(2) 심리적(心理的)으로 보는 음양(陰陽)


이번에는 또 다른 예로써 음양의 대립되는 관계를 이해해 보도록 한다. 그 중에서도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복잡하고 미묘한 물건이기 때문에 항상 알다가고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이 마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 것인가를 궁리하는 것이 심리학(心理學)인데, 물론 낭월이도 이 심리의 구조를 사주팔자를 이용해서 한번 파악해 보려고 각고의 연구를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 한번 도표로써 나타내서 마음의 음양에 대한 구조를 이해해 보도록 하자.


양의 마음 음의 마음


과거좋은 것만 기억한다 / 어둡고 슬픈 것들만 기억한다

현재적극적으며 희망적으로 생각 / 소극적이며 부정적으로 생각


미래앞만 쳐다보고 돌진한다 / 앞으로 나아가기가 두렵다

신앙미래지향적인 종교에 관심 / 내면적이고 정적 종교에 관심


물컵아직도 절반이나 남았다 / 벌써 절반이나 마셔버렸다

사랑그림같은 집과 알뜰한 가정 / 사랑은 불행의 씨앗인데...


오염아직도 맑은 공기는 많다 / 조금만 있으면 숨도 못쉰다

행동우선 저질러 놓고 본다 / 돌다리도 두드려봐야 한다

기타전반적으로 희망적이고 미래지향적이다 / 전반적으로 부정적이고 과거집착적이다


이러한 심리적인 음양의 구조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쳐서는 곤란 하겠다는 생각이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으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과히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3) 음양으로만 나눌 것인가?


음과 양이라는 이분적으로 모든 삼라만상을 나눌 수가 있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과연 모든 것에 대해서 음과 양으로만 나눌 수가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는 표면적으로 볼적에는 일단 음양이라는 대립되는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이 기본인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상대성이론’이라는 것을 창안했던 아인슈타인 선생이 탁월하다는 대접을 받게 되는 것도 어쩔 수가 없는 현실이고, 또한 사실 그만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우리 역학의 분야에 들어오면 가장 기본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면서. 사실 상을 받는다면 주역의 학자들이 받아야 할 것이라는 어거지를 써보기도 한다.


주역이라는 것은 순전히 음(--)과 양(―)으로 표기하는 학문이다. 이렇게 단순한 표시를 가지고서 이 땅위에서 벌어지는 삼라만상의 성쇠(盛衰)를 표현할 수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이라면 기적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음과 양으로 표시되는 상대적인 관계 외에 과연 또 다른 무엇이 없을 것인가를 가끔 생각해보데 된다.


이러한 것이 반드시 있다고 전제를 하고 싶은 마음인데, 이것을 일러서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닌 것’이라고 하던지, 또는 ‘음이면서도 음이 아니고 양이면서도 양이 아닌 것’이라는 말로 하던지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음과 양이라는 것 말고 그 사이를 흐르는 중간(中間)이라고 할 수가 있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음양의 구조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흐르고 있는 어떤 성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지 않고서는 어쩌면 매우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될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낭월이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4) 음양을 결합시키는 그 무엇


음과 양은 서로 대립을 하면서도 반목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사실은 음과 양은 서로 조화를 이뤄가면서 뭔가를 창조하는 성분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질적인 성분이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뤄내는 것은 과연 무슨 힘에 의해서일까?


낭월이는 이러한 성분을 중(中)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음양중(陰陽中)이라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과 양이 있는 영역의 사이에 어떤 성분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성분은 중용의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인데, 음과 양이 서로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중간에 있는 형태의 힘에 의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성분에 대해서는 단순히 음양의 대립되는 구조로만 살펴본다면 전혀 생각을 해볼 겨를이 없게 된다.


움직이는 성분은 음양이고 움직이지 않는 성분은 중간이라고 생각된다. 보통의 안목으로는 움직이는 것만 살피게 되지 움직이지 않는 것에는 마음이 쓰이지 않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을 살피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것을 살피기 위해서는 이 마음도 움직이지 않을 때에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은 어떻게 가능한가?


움직이지 않는 마음은 삼매(三昧)에서만 가능할 것으로 본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비로소 움직이는 이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실체륾 드러낼 것이라고 추리를 해본다. 


그러니까 이렇게 쉬임없이 흐르고 있는 마음으로는 그 실체를 도저히 파악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너무 현학적이라고 생각하실런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이러한 결론을 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달리 더 명확한 방법을 찾을 방법을 모르겠다.


비록 이러한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을 하려면 도인의 경지에서 삼매에 몰두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상상만으로 어떤 결론을 유도한다는 것이 무리인 것은 알겠으나, 상상을 하는 것조차도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 영역은 아마도 명리학을 연구하는 학자에게는 영원한 숙제가 될런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언젠가는 이 영역에 대해서 분명하게 어떤 설명을 할 수가 있을런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 만족을 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을 바로 인식한다면 비로소 음양의 대립되는 경지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좀더 확대해석을 한다면 이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대 자유인이 된다는 말이다. 


선이나 악이라는 굴레, 혹은 천당과 지옥이라는 분별심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경지를 역학에서는 중화(中和)라고 할 수가 있겠고, 불교에서는 중도(中道), 혹은 해탈(解脫), 또는 열반(涅槃) 이라는 말로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분명한지는 모르겠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永生)도 이 영역에 포함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모든 상대되는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될것이고, 이때에야 비로소 도인(道人)이라는 말을 쓸 수가 있을 것이다. 


오행의 상생과 상극의 윤회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완전한 자유를 이야기 하기가 불가능 할것이라는 생각만을 해본다. 


지금의 우리는 다만 음양의 중간에 있는 그 무엇에 대한 존재를 인정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리라고 생각된다. 이 정도로써 어찌 생각해보면 남의 다를 긁고 있는지도 모르는 중간(中間)에 대한 말씀을 줄인다.




3. 음양의 순환법칙


음양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돌고 도는 것을 일러서 음양이라고 한다. 낮과 밤이 서로 교차되듯이, 달이 차서는 기울고 하는 순환을 되풀이 하듯이, 또 1년의 사계절이 항상 규칙적으로 순환을 하듯이 그렇게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다.


형상●◕󰁋◔◯

상황純陰陰中之陽陰陽中和陽中之陰純陽

오행水金土木火


위의 표에서 보듯이 음양의 비율을 그림으로 나타내 볼 수도 있다. 여기서는 가운데의 음양균형을 가장 이상적으로 본다. 


그렇지만 사람의 사주에는 그렇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흔치 않다. 대개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 인간의 사주이고 또 그에 부합해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삼라만상이 모두 이렇게 뭔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서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정진(精進)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어느 한가지에 대해서 형상을 본다면 그 이면에는 보이는 것과는 반대가 되는 어떤 형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즉 순양(純陽)의 형태가 겉으로 보인다면 그 이면에는 순음의 성분이 잠자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순양에는 순양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 


이 그림이 음양이 이상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라고 본다. 즉 우리는 이 그림을 태극(太極)이라고 부른다. 음과 양이 서로 균형을 이루면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이렇게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태극이라고 부르지, 만약에 음양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아무도 태극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태극은 그래서 매우 신성한 음양의 균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국기에서 이렇게 심오한 도형인 태극을 사용하게 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일설에는 음양오행의 근원을 추적해보면 한반도의 고대사로 접어들게 된다는 글을 읽어보면서 아마도 원래의 태극 사상을 찾아낸 인간도 바로 우리 동이족이라서 그 주인의 자손들이 국기에다가 음양의 상징을 넣어서 사용한다고 생각해본다.


그러면서도 정작 태극의 국민들은 음양의 참 이치를 모르고 그냥 주역에서 쓰는 팔괘를 국기로 사용하고 있나보다 하는 정도만 인식하고 있는 것도 참 묘하다면 묘한 일이다.


陰極卽陽生 陽極卽陰生

음극적양생 양극즉음생


음의 기운이 극에 달하면 양의 기운이 생기고

양의 기운이 극에 달하면 음의 기운이 생긴다.


이러한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음양의 순환법칙을 음미한다.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이 생긴다는 말은 기쁨이 극에 달하면 슬픔이 생긴다는 말도 된다. 웃음이 너무가 벅차오르면 눈물이 생기는 경우를 접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슬픔이 극에 달하면 웃음이 나오는 경우도 겪어 봤을 것이다. 이러한 인생살이를 통해서 옛어르신의 말씀을 되새기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공부라고 본다.


주역에서 표시하는 64괘는 항상 나쁘기만한 괘도 없고, 항상 좋기만 한 괘도 없다고 한다. 오늘 나쁜 의미의 괘상은 내일은 또 좋은 괘상으로 변한다. 


그래서 잠시 기다리면서 근신을 하라고 한다. 그리고 오늘의 좋은 괘는 내일도 좋다는 보장이 없다. 이미 한 방면의 극에 달한 기운은 기울 준비를 한다는 말씀이다. 


차면 기우는 법칙은 균형을 이루는 음양의 법칙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공자도 만년에 역경(易經)의 심오한 이치에 젖어들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옛 어르신이 말씀하시기를 ‘공을 이룬 후에는 물러갈 줄을 알아야 한다.’고 하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자연의 법칙이랄지 조화랄지 그런 것을 생각해 보면 항상 자신의 일을 한 후에는 조용히 물러가고 다음의 타자에게 일을 전해주는 모습이 느껴지는군요. 


음양의 이치도 바로 이와 같은데, 그렇게 서로 조화를 이뤄가는 것이 아마도 자연이라는 말에 어울릴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사람도 자신의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고서 과욕을 부리고 있을 적에는 자연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1) 음양의 비율


陰과 陽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또 서로를 돕는다. 이것이 자연(自然)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상황을 본다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즉 견제를 하는데에도 정도문제가 있는 것이다. 


100%의 견제도 있을 것이고, 약간의 겁을 주는 정도도 있을 수 있겠다. 이러한 정황에 따라서 그 차이가 나는데, 이러한 차이점을 알기쉽게 표시하는 것이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 오행(五行)이라는 것이다. 다섯가지의 원소가 서로 대립과 견제를 하는 기본형인데, 그 상황이란 좀더 설명을 한다면 표와 같다.


음양의 비율五行명칭(名稱)


陰體음의 기운이 전체를 장악했을때水(陰中之陰)

陽體음의 기운에서 양의 기운으로木(陽中之陰)

陽體양의 기운이 전체를 장악했을때火(陽中之陽)

中間양과 음의 기운이 균형을 이룸土(陰陽中和)

陰體양의 기운에서 음의 기운으로金(陰中之陽)


이러한 음양의 각기 다른 상황을 오행이라는 말로 설명을 하게 되는데, 그 각각의 비율차이에 띠라서 실제적으로 분명한 차이도 있게 된다. 그 각기 다른 차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단계로 五行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된다.


사주팔자(四柱八字)를 음양오행학(陰陽五行學)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 말은 음양오행에 대한 공부를 하면 사주팔자를 잘 알수 있다는 말도 된다는 뜻이다. 


사실 음양의 비율을 잘 헤아리고 분별하는 것이 명리학이다. 그래서 음이 얼마나 많은가? 또는 양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저울질이라고도 하는데, 저울질을 잘 하는 사람이 장사를 잘 하듯이 음양비율의 정도를 잘 분석하는 학자가 깊이 들여다보고 멀리 내다본다.


표를 봐서 알 수 있듯이 양이 극에 달한 것은 불(화(火)이라고 한다. 그리고 음이 극에 달한 모양을 물(水)라고 한다. 또 양중에서도 음의 기운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나무(木)라고 하며, 음 중에서도 양의 기운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쇠(金)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주역에서 말하는 사상(四象)이론과도 원칙적으로 부합된다. 사상에서는 괘상의 형태로 나타내는데 표로 만들면 이렇게 생겼다.


四象의 卦象陰陽比率五行分類

太陽󰁍純陽之氣火

少陰󰁎陽中之陰木

少陽󰁏陰中之陽金

太陰󰁐純陰之氣水


여기서 보자면 太陽은 火와 같다고 보겠고, 少陰은 이름은 음이라고 하는 말이 뒤에 있어서 음인가 할 수도 있겠으나, 실은 글자 그대로 ‘음의 기운이 적음’이라는 뜻인바 그 본체는 양이면서 음의 기운이 적게나마 들어있는 木과 같다고 보겠다. 


또 少陽도 같은 이유에서 본체가 음인데 양의 기운이 조금 서린 뜻이니 金과 같다고 하겠으며, 太陰은 글자 그대로 水와 같다고 보면 되겠다. 


이렇게 오행으로 대입을 시켜보면 목화금수의 형태와 흡사하다. 그런데 사상에서는 토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동무 이재마(東武 李濟馬) 님의 사상론이 어쩌면 토에 대한 이론이 빠진 관계로 해서 완성이 되지 못한 것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한의사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상의학이 획기적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토의 성분이 없이 사상이라는 것만 이용해서는 인간의 구조를 제대로 설명하기가 어려웠을 거라는 염려가 앞서는 것은 오행가의 지나친 염려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팔상론이라는 이야기도 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래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목화금수의 대립을 서로 조절해주는 조절자의 역할을 하는 것을 흙(土)이라고 부른다. 사실은 五行이라고 하는 것 중에서 가장 개성이 없으면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 토의 성분이다. 


여기서 주의를 해야 할것은 목화금수가 모두 음양의 형태에 따른 기호라는 점이다. 그러고보면 기본은 역시 음양이라는 법칙이라고 하겠다.


기본 구조는 이렇게 간단하다. 그런데 이것들을 인간의 일상생활에 그대로 대입하게 되는 사주공부를 하다보면 그렇게 만만한 구조가 아니라는 생각이 필히 들기 마련이다.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과정에서 파생되는 많은 사연들은 정말 처음으로 공부를 해보려고 마음을 낸 초학자(初學者)에게는 대단히 혼란한 이론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하나하나 배워나가다 보면 능히 이해를 하게 되겠지만, 성급한 마음으로 얼른 신통방통한 예언을 해서 족집게도사가 되고 싶다는 허망한(!) 욕심을 갖고 있는 초학자라면 아마도 틀림없이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2) 음양의 변형(變形)


이미 앞의 설명에서 오행(五行)이라는 용어가 등장을 했다. 이 오행이라는 부호는 엄밀히 말한다면 음양의 형상을 분류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음양의 각기 다른 모습을 고정시킨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음양이라는 것만을 갖고서 그러한 다양한 변화된 모습을 이해하기에는 다소 복잡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고, 그래서 아예 그러한 구조를 어떤 부호로 표시해서 간단하게 인식을 하도록 해야 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한 부호가 바로 오행인 것이다. 남자를 양이라고 하고, 여자를 음이라고 했던 비유를 다시 여기에 끌어온다면,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지 생각해본다.


원래의 음양이라는 형상으로 설명을 할 적에는 남자와 여자를 대표적으로 음양이라는 말로 표시해서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점차 다양한 형태의 음양이 발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양이라고 하는 남자 중에서도 크게 봐서는 모두 양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여자의 분위기를 갖는 남자가 있었다. 


그러한 사람은 남자라고는 하면서도 어딘지 남자 답지 않은 모습에서 또 한번의 분류과정을 거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부류의 남자들에게는 ‘여자같은 남자’라는 이름을 부여하게 되었다.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의 여성다움이 외곡되면서 나중에는 여자이면서도 남자보다도 더욱 억센 형상을 한 여자가 등장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사람은 단순히 여자라고 하는 말로만 묶어두기에는 상당히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을 묶어서 ‘남자같은 여자’라는 말로 부르기로 했던 것이다. 이렇게 분류를 하게 되는데, 이 상황에서 볼적에 남자같은 여자의 부류는 겉모습은 여자지만 실제로는 남자의 성격이라고 봐야 할 상황이었다. 


또 여자같은 남자도 마찬가지로 겉모습은 남자지만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하나같이 여자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분류를 하다가 보면 남자도 여자도 아닌 부류가 있어야만이 ‘음양의 중간’에 해당하는 성분을 나타낼텐데, 그러한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한다. 


구태어 있다고 한다면 형상에 구애받지 않고, 그 마음이 어느 곳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중화를 이룬 사람들이라고 하면 말이 될것도 같다. 


아니면 성인(聖人)의 무리라고 볼 수도 있겠다. 세간의 모든 욕망을 떠난 자유인은 성별에 의해서 자신의 욕망이 발동하지 않으므로 구태어 여자니 남자니 하는 말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치로 봐서 음도 양도 아닌 사람이기도 하고, 또 음이기도 양이기도 한 사람도 되는 사람은 음양이 중간인 성분으로 볼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던 이렇게 해서 기본적인 혼돈으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서 음양이 되었고, 그 음양은 또 더 많은 세월이 흘러서 더욱 복잡한 형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본다.




신 유토피아


두 사람의 남녀가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남자라던지 여자라고 하는 생각이 없이 그냥 즐겁고 천진스럽게 동산을 뛰어놀면서 하루하루를 살았다고 한다. 그


들은 모두 한가지의 근원에서 태어난 각기 다른 성분이었지만 그러한 것을 분별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배고프면 과일을 따먹고 목이 마르면 흐르는 물을 마시고는 다시 신나게 놀기만 하면 되었다. 그야말로 낙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절은 음양이 구분되기 이전의 혼돈의 시절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언제나 마음을 먹으면 그대로 이뤄지고 가고자 생각하면 그대로 도달하는 자유로움이 존재하는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 두 남녀는 보고 듣는 것이 확장됨에 따라서 분별심이 발생했다. 즉 음식을 먹는데에도 더 맛이 있는 것과 덜 맛이 있는 것을 구분하게 되고, 그래서 결국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구분이 생기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것을 결정적으로 일러준 것은 한 마리의 여우였다. 이 여우는 두 사람이 노는 것을 보면서 말했다.

“여보시게, 저쪽으로 가면 아주 맛있는 사과가 있는데, 그 사과를 먹어보라구 얼마나 맛이 있는지 몰라.”

그래서 두 사람은 함께 그 사과를 먹으면서 여우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우는 맛이 있는 것을 얻는 방법과 맛이 없는 것을 가려내는 요령도 일러주었는데,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에 두 사람은 매우 강한 호기심이 발동해서 그렇게 구분을 해보았고, 또 재미가 있었다. 


재미가 있자, 스스로 그렇게 재미있는 일꺼리를 찾아다니게 되었는데, 그 일꺼리 중에서는 서로의 몸의 구조가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몸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도 역시 여우를 통해서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알음알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분별심을 일으킨다는 것이고 분별심은 다시 말하면 음양(陰陽)이라는 구별을 하게 된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이것은 석가모니가 말하는 원래의 맑은 불성이 세월을 거치면서 분별심에 의해서 선악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서 취사(取捨)심이 발생하였으니 그 후로는 사람들이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과도 서로 통한다고 보겠다.


그렇게 분별을 하고 나서는 서로는 서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두 사람은 더욱 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이미 좋다는 것과 나쁘다는 것의 개념이 발생했기 때문에 그 후로는 모든 것을 이러한 기준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려고 했다. 


그래서 여우가 일러준대로 하다 보니까 자식도 생기게 되고, 사냥도 더욱 많이 해야 했으며 그 결과로 대단히 많은 기준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언제 밤이 되고, 언제 눈이 오는지도 표시를 해 두었다가 활용을 했다. 소위 말하는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 인식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이라는 것을 만들게 되었고, 그 기준에 따라서 크게 다섯가지의 기준을 세웠던 것이다. 그 다섯가지는 바로 음양이 오행으로 분화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이와 같이 원래의 낙원이라는 것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서 주변에 흐르는 사물에다가 눈을 맞춰놓고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니,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할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나은 것 중에서도 좀더 나은 것을 생각하게 되고, 나쁜 것 중에서도 좀더 나쁜 것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다섯가지의 기준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오행이라고 하는 것이고, 불교로 따진다면 오온(五蘊)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온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하는데, 눈으로 봐서 사물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고서는 그 자료는 머릿속에 저장이 되는 것을 말한다.


비유가 다소 유치한 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음양과 오행의 과정을 생각해 보는 마음으로 간단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중요한 것은 오행이라는 것도 별개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음양이 서로 만나고 대립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산물이라고 보자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성분들도 또한 시간이 경과함으로써 각기 자신의 독립된 개체로써의 인격을 주장하게 됨으로 인해서 나중에는 오행이라는 별개의 형태로 대우를 해 주는 것이라고 보자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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